• '서태후'의 사치 & '김연아' 피겨스케이트 열정!
  • 입력날짜 2012-10-16 07: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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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 최고 통치자였던 서태후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 그녀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끼의 음식은 무려 128가지였고 옷은 3000 상자에 이르렀으며 비취 그릇에 음식을 담았듯 보석에 대한 집착도 대단했다.
서태후의 60대 후반의 모습이다.  1835.11.29~1908.11.15
서태후의 60대 후반의 모습이다. 1835.11.29~1908.11.15
그녀는 47년 간이나 통치를 했는데 그 기간을 연장할 요량으로 자신의 아들마저 비참하게 죽였고 황후마저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

청일전쟁 중에는 군비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했다. 결국 청나라는 전쟁에 패했고 그녀는 황제였던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개혁파들을 처형시켰다.

권력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면 인륜을 버리게 되고 악을 일삼기 마련이다. 이는 그것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젊은 시절을 상기한다.

인간의 철학은 사랑이 육신적 결합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고 가르친다. 사실 이 결론은 진솔하기까지 하다. 결국 사랑은 소유에서 출발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만져져야 하고 느껴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랑이다. 소유할 수 없다면 관심도 갖지 않는다. 이것이 궁극적인 인간의 한계이며 삶의 실상이다.

세속적 욕망추구 영혼의 빈곤귀결


그것의 모습은 각자에게 각기 다르지만 인생은 아픔을 알면서 성숙하게 되고 그 아픔을 통해 행복도 느끼고 사랑의 가치도 알게 되는 법이다. 김연아는 먹고 싶은 게 많았다. 단 10분 만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또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놀고 싶었다. 오늘 연습 없는 날이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주니어 무대를 화려하게 마무리한 뒤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2006년 시니어 데뷔 무대를 앞두고는 연습을 하던 도중 너무 힘들어 피겨스케이트를 그만 두려고 결심했다. 스케이트화는 발에 맞지 않았고 발목 인대 부상은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늘 힘이 돼 주었던 어머니조차도 딸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이를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생활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친구들은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하고 있었지만 연아는 할 게 없었다. 피겨 스케이터 꿈을 접고 나니 그녀는 맨 꼴찌나 마찬가지였다. 김연아가 가장 잘하는 것 또 앞으로도 잘할 수 있는 것은 스케이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슈퍼스타즈 온 아이스 아이스 쇼를 마지막으로 스케이팅을 접기로 했다. 쇼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연습을 하는데 스케이트화가 편하게 느껴지고 점프도 완벽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링크 위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 순간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 날 이후 김연아는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단다. 인생에서 어렵고 힘든 순간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역경을 견디고 이겨낸 이들은 새로운 경지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도 결국 인간에게는 완전한 경험이 될 수 없다. 궁극의 만족이나 행복으로 연결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그 사랑을 연장한다고 해도 결국 그 사랑도 허전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배고픔이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과 함께 그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에 와서 정보 중심의 의사소통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면서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의 역할이 줄게 되고 삶을 공유할 장도 소멸되고 있다. 이는 근대화가 인간의 삶을 말살시킨 결과이다.

근대 철학과 기술 문명은 인간의 삶을 물질로 바꾸었고 본질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끊게 만들었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게 되었고 자기 정체성을 잃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인생의 고독 속에서 자기 정체성과 삶의 단편을 찾아 헤매는 모험을 계속한다.

어떤 이에게 삶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여정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여정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여정은 미완성일 뿐이고 허무할 뿐이다. 스스로에게서 진리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혜로운 척하기 때문에 인생은 진리로부터 멀어져 간다. 모든 가치를 육체에 둘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살고 싶어하고 또 동물들과 달리 기도를 하는 이유는 그 염원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동물에게서 발전을 보지 못했고 원하는 것이 충족될 때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이 결국 육체를 벗어나 궁극적인 대상과 조우하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난 개인적으로 그것을 경험했고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각자의 여정이 다를지라도 궁극의 종착역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브레이크뉴스 전북판에도 실렸습니다.

최형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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