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어머니 며느리 관계 이어준건 이것!
  • 입력날짜 2012-10-03 06:46:11
    • 기사보내기 
'시월드', 어머님, 많이 많이 사랑하고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500년 된 돌담 앞에 ‘삐익!’ 차가 섰다.

"저희들 왔어요."

왁자지껄 하며 형님, 아지매들이 마중 나왔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새댁이 참 복스럽구먼" 하며 덕담을 하신다. 대문 턱에 짚불을 놓고 문 안쪽에 양렬로 서서 박수를 치며 새조카 며느리를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주는 형님들이다. "어서 불을 사뿐 넘어와! 그래야 악귀와 시샘하는 것들 다 떨치고 이 잡안에 들어오는 거여."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환대에 새아기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내 며느리, 그러니까 내 아들의 아내가 낯선 이곳에 첫발을 디딜 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형님들께 말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벤트를 해주셨다.

경남 함안, 시집인 이곳은 낯설기만 하던 곳이었다. 서울에서 마산까지 기치타고, 마산에서 함안까지 버스로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10분여 마을 어귀까지 간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집이 있다.

설을 하루 앞둔 그날 비가 부슬부슬 오는 깜깜한 밤이었다. 무심코 내디딘 발이 흙속에 빠져 고무신과 하얀 버선은 분리되어 버렸다. 당황한 새신랑 남편은 신문지를 뚤뚤 말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난 치렁치렁한 한복 치마를 움켜잡고 맨발로 말없이 걸었다.

지난 9월 9일 종영된 KBS2 TV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지난 9월 9일 종영된 KBS2 TV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
 
난 어쩌다가 동화에서 나올듯한 이 산골로 시집왔을까, 내 꼴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종부로 살아오신 시어머니는 그리 힘들게 온 내 꼴을 보고도 따뜻한 말 한마디 없으셨다. “쯔쯧”하며 휑하니 들어가셨다.

좀 일찍 와서 음식 장만하는 척이라도 하지 밤 늦게 도착한 며느리가 몹시 못마땅하셨나보다. 그해 설날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양력설과 음력설을 이중으로 지내면 낭비라 하여 휴일을 없애버렸다. 공립학교 교사였던 나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학생들도 모두 쉬고 싶어 하는데 담임교사가 쉬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며 목청을 높히는 교장 선생님 꾸중보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내려온 터였다. 새댁이라는 이유로 환대해 주기를 기대했던 난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늦게 온 이유를 묻지 않으셨고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 또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차례 지내느라 모두 바빴고 그 다음날은 새벽부터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시어머니는 몸 조심하고 잘 가라는 말 대신 다음엔 돈 좀 많이 가져오라고 하셨다. 시어머니와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 명절이면 나 나름대로 내복, 한복, 고기 등 이것저것 싸들고 정신없이 내려갔고 어머님은 늘 "이런 것 필요없다."고 하셨다. 정말 싫으신 것인지 도무지 그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고맙다. 참 좋구나.’라는 말을 왜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심값도 남기지 않고 빈털터리로 서울에 돌아오면 어머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만 차곡차곡 쌓여 갔다. 언젠가부터 난 말문을 닫았다. ‘네, 전 잘 모릅니다.’ 외엔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머님도 무엇을 느꼈음인지 말씀이 없으셨다.

아무 말이 없는 내가 답답했던지 어머님이 다른 친척들이 있는 자리에서 "어미는 반벙어리 아이가?" 하셨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지 않으니 상처를 입지 않아 좋은 점도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서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그때 우연히 아리랑(조정래)과 토지(박경리)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시댁과 같은 집안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나무 껍질을 먹으면서도 올곧은 양반 정신을 잃지 않으려 얼마나 죽을 힘을 다해 살았는지 알게 되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6.25때 혼자가 된 몸으로 종갓집을 지키려 무던히도 애썼던 시어머니셨다. 시어머니는 그 무엇보다도 종부로서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힘든 삶을 자긍심 하나로 버티셨다. 나를 챙겨주지 않는 어머님이 서운해 나는 시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난 후 그간에 저 멀리서 어머님을 바라만 본 내가 너무 죄송스러워 아주 긴 긴 편지를 써 우편으로 보냈다. 어머닌 내가 보낸 편지에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나 역시 궁금하지만 여쭤보지 않았다.

어머님과의 익숙해진 묘한 관계는 한참 후에 그 편지가 부산에 계신 친척분 들까지 읽었다는 애기를 듣고서야 조금씩 바뀌었다. 힘들었던 당신의 삶을 알아준 며느리가 고맙고 자랑스러우셨나 보다. 우리는 조금씩 소통이 되기 시작했다.

"어머니, 주무시고 가셔요."
"싫다."

"아, 그럼 편할 대로 하셔요."
"어미 너는 다시 한 번 권하지도 않냐?"

무뚝뚝하기만 한줄 알았던 어머니는 순박한 유머로 주위 사람들을 웃게도 했다. 이웃집에서 인사와 "할머니, 참 고우셔요." 하면 "아이고, 내 손 타면 우짤꼬." 하신다. 어머니를 조금씩 알아갈 무렵 어머닌 아프셨고 세상을 하직하셨다. 조금 더 일찍 서로를 알았더라면 더 많은 추억을 남겼을 텐데, 내 아이에게도 할머니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텐데......!

세월은 눈 깜짝 할 사이에 흘렀고 이제 내가 시어머니가 되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며느리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걱정스러웠다. 예전의 나처럼 입을 다물어버리면 어쩌나! 아무리 며느리 편에서 생각하려 해도 모든 사랑을 다 퍼부었던 아들과 떨어지는 섭섭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즈음 대부분의 며느리들은 ‘아니오’라 말하지 않는단다. 시어머니도 며느님 모시느라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보니 겉모습은 마찰 없이 굴러가는 듯 보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참 가까울 수 있는 사이인데 안타까웠다.

내가 먼저 며느리에게 편지를 썼다. ‘새아가,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지?’ 로 시작하는 편지다. 글을 쓰다보니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생기고 서운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답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편지 받으니 정말 좋았어요.’ 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을 키워 가고 있다.

조금 전 며느리한테 메일을 받았다. '어머님글 읽는 재미가 점점 커지고 있어요. 글 통해서 어머님 살아오신 날들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잘 알 수 없었던 부분들도 알게 되니 정말 좋아요. 계속 파이팅 하세요.’

어느새 내 얼굴엔 미소가 가득이다. '어머님, 많이 많이 사랑하고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임춘신
<저작권자 ⓒ 영등포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