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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한종선씨 이야기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인터넷에서만 떠돌던 인권유린사건의 증언자가 나타난 2012년은 형제복지원이 폐쇄(1975~1987)된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어사전에서 ‘복지’란 행복한 삶(명사)이라고 표기돼 있다. 1984년 당시, 9살이던 한종선씨는 누나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파출소에 갔다. 아버지는 종선씨와 누나에게 '여기 좀 있으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곧 ‘이상한 사람들이 파출소에 들어와 무슨 사인을 한 후’, ‘아저씨들이 우리를 차에’ 태운 후부터 3년동안 종선씨와 누나의 삶을 휘젓는 인권유린이 시작됐다. 기다렸던 아버지마저 알콜중독 증세로 형제복지원으로 입소되었다. 그렇게 세 식구가 형제복지원에서 다시 만났다. 한씨의 어머니는 그가 아주 어렸을 적 집을 가출하였고, 큰 누나는 친척집으로 가서 살았다.
고은태 엠네스티 집행위원, 한종선 저자, 변영주 영화감독 © 김아름내
형제복지원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 형제‘복지’원에서는 행복한 삶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강요, 압박, 폭력이 자행되는 곳에서 어린 종선이가 느꼈던 당시의 폭력은 총 379페이지에 달하는 살아남은아이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의 187쪽을 차지하고 있다. 사이사이 그가 보고 겪었던 폭행의 흔적을 보여주는 그림도 수록돼있다. 다른 페이지는 전규찬 교수와 박래군 인권활동가의 개관적 사실과 서술로 풀어져있다. 지난 22일(토) 홍대 근처에 소재한 가톨릭 회관에서는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한종선씨를 비롯한 고은태 엠네스티 집행위원, 변영주 영화감독, 독자들이 참석하여 책에 대한 이야기, 인권유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변영주 감독은 “주요 이슈에 숨겨져서 많은 사람들이 주변부로 밀렸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많다”며, 불행은 (이들이) 선택한 삶의 ‘불행’이 아니라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연행된 ‘강제화 된 불행’이라 말했다. 고은태 엠네스티 집행위원은 “이 책을 읽고 간단한 소감을 트위터에 올렸을 때, 어떤 분이 통학하는 길에 빤히 보였던 곳이었다고 했다. 87년도에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부산 외곽지역에서 벌어진 일인 줄 알았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이 사건은) 우리의 삶속에 깊이까지 침투해있는 폭력”이라 강조했다. 그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복지원으로 입소된 사람이 많았다. 밤에 술을 먹고 길을 걷던 사람, 공원에서 잠자던 사람, 길 잃은 아이, 고아아닌 고아 등. 그들은 눈 떠보니 복지원이었고 그곳에서 짧게 는 며칠, 길게는 몇 년 동안 폭력을 당했다. 배우 김의성씨는 “우리의 편함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어떤 방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가,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고 고통을 느꼈다고도 했다. 본 기자는 그 고통을 담담하게 쓴 책으로 인해 악몽을 꾸기도 했다. 한씨는 글을 쓰고 난후 몸이 아팠다고 했다. 지우고 싶은, 잊고싶은 기억을 꺼내려고 하니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책에는 한씨가 폐쇄된 복지원을 나오면서 다른 고아원에서의 생활, 청년기의 생활, 글쓰기 전 후의 생활을 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아원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않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정을 필요로하고, 기대고 싶어한다. 사회 사람들은 처음엔 (우리를)보듬어주지만 이용한다” 이것이 그가 느끼는 사회사람들의 모습이다. 또 그는 “큰 것을 보지 말고 작은 것부터 봐주세요. (사람들에게) 형제복지원이 잘 알려져서 이런 사건이 다시는 우리사회에 발 못 붙이도록 도와줘야한다”라고 했다. “피해보상이 있어야하지만 시민들에게, 여러분들에게 물리적으로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목적으로 해마다 20억원씩 국고의 지원을 받았지만, 그 안에서는 구타와 폭력, 폭언, 강제구금이 일삼아졌다.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구타로 숨지면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531명이 사망(국가기록원)하여 인근 뒷산에 무덤을 만들기도 했고, 일부 시신은 의과대학 해부실습용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당시 형제복지원의 원장은 겨우 2년 6개월 형을 살고 나왔으며, 2011년까지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의 이사로 활동했다. 올해 7월에 있었던 무인도 체험현장에서 학생 2명이 사망한 사건의 김해 대안학교 이사장도 형제복지원 원장이었던 박 씨다. 인권유린이 12년 동안 자행되었지만, 복지원의 피해자들은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 씨는 말했다. “법이 강제로 용서시켜준 것”이라고.
김아름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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