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 인사들이 즐겨찾는 곳 ‘천강에 비친 달’
  • 입력날짜 2013-03-28 10:58:00 | 수정날짜 2013-03-28 11: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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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란 대표 인터뷰] 인사동에 들어온 건 팔자?
어둠이 내리면서 켜진 '천강에 비친 달'
어둠이 내리면서 켜진 '천강에 비친 달'
인사동 골목길에 어둠이 내려앉자 골목길 외벽에 걸린 간판들이 하나둘씩 불빛을 뿌려대기 시작한다.

사전 예약 없이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요청하고 약속을 잡기까지 불과 몇 시간, 그렇게 이루어진 인터뷰를 위해 우성란 대표가 운영하는 인사동 ‘천강에 비친 달’을 찾았다.

인터뷰를 위해 우 대표를 기다리는 가게 안으로 2명의 중년 여성이 들어섰다. 앞에 있던 우 대표의 오랜 지인인 백도영 실장이 손님을 맞는다,

천강에 비친 달은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까? 순간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대구에서 왔는데요.

▶대구에서 여길?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일행을 가리키며) 친구 따라 왔어요.

(일행에게 다시 묻는다)
▶특별히 '천강에 비친 달'을 찾아오신 이유가 있을까요?
네. 이곳은 제가 좋은 사람들을 만난 곳이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찾아왔어요.

▶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 진보인사들이 즐겨 찾는 “천강에 비친 달” 우성란 대표와의 첫 인터뷰는 15일(금) 오후 7시 ‘천강에 비친 달’에서 진행되었다.
인사동에 들어온 건 팔자라고 말하는 우성란 대표
인사동에 들어온 건 팔자라고 말하는 우성란 대표
▶반갑습니다. 인터넷신문 영등포시대에서 나왔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저도 ‘천강에 비친 달’ 10년이 넘은 단골입니다. 기억 못 하시지요?(웃음) 원체 많은 분이 다녀가실 테니까요. 진보인사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다는 데 동의하시나요?
네, 물론 동의합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으니까요.

▶진보인사들의 도움이 컸다고 하셨는데. 인사동은 언제 들어오셨어요?
1998년도에 들어왔으니까 15년 됐습니다.

▶들어오게 된 동기나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동기나, 계기요? 팔자죠. 뭐

▶팔자요? (웃음) 그럼 그 팔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1989년 후반부터 1997년도 초반까지 대략 7년, 횟수로 8년 정도 불교운동을 하는 동안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접고(그만두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백양사로 내려가 1년 정도 생활했습니다.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
네. 맞아요. 당시 불교운동을 하면서 제가 모셨던 지선스님이 백양사 주지 스님으로 계셨거든요.

<백양사(白羊寺)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양산(白羊山)에 있는 절.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如幻) 대사가 창건하였다>

▶백양사에 내려가서 생활한 1년과 우 대표의 인사동 생활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제가 백양사에 내려가 있을 때 많은 지인이 찾아와 격려와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 차와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대접해 드렸지요. 그때 음식을 드셨던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이 보살이라는 덕담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한정식집 운영을 권하곤 하셨지요. 그게 인사동에 들어오게 된 단초라면 단초고 계기라면 계기네요.

▶인사동 얘기를 먼저 할까요? 아니면 불교운동에 대한 질문을 먼저 드릴까요?
사실 불교운동과 인사동은 저에게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순서가 필요하다면 불교운동에 대한 말씀을 먼저 하시지요.(웃음)

▶8년 동안 하셨던 불교운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계급운동을 염두에 두고 물으시는 것 같은데요. 계급운동이 아닌 부분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 드리자면 기독교에 YMCA가 있듯이 저희 불교계에도 1920년도 말에 만해 한용운 선사가 만든 대한불교청년회(이하 대불청)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거기서 활동했습니다.

▶8년 동안 해왔던 불교운동 중 가장 힘들었던 일과 보람 있었던 일을 한가지씩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힘들었던 일도, 보람 있었던 일도 모두 1994년에 펼쳤던 종단개혁운동을 꼽고 싶습니다.

▶종단개혁 운동이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부탁하겠습니다
종단개혁운동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불교계도 80년대에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종단개혁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면 5.18 민주화운동과 독재정권타도, 6월 항쟁 등이 있습니다.
어떤 운동이 불교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는 말씀이신지?

불교계도 사회 민주화의 흐름과 함께 진행되는 일련의 움직임으로부터 당연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당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 출신들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불교인들이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 나섰으니까요. 이분들이 대불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대불청 개혁을 함께 이뤄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80년 민주화 운동이 사회와 특정단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그분들이 종단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80년대 초, 아마 1983년도쯤으로 기억하는데요. 당시 불교계에 내제 되어 있던 모순과 부패로 인해 추락하던 불교의 재건을 위해 비상종단이 꾸려져 1년 정도 활동을 하며 대책을 내놓는 것을 시작으로 개혁과 민주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불교계의 지도부는 못물처럼 터져 나오는 비판과 개혁의 흐름에 제대로 부흥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비판과 개혁의 움직임에 부흥하지 못했다?
제가 불교계 전체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다만 제가 직접 참여했던 1994년 불교종단 개혁운동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1994년 당시 대한불교 조계종은 서의현(서황룡) 스님이 총무원장직을 수행할 때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 총무원장이 불교계의 분란을 일으킨 당사자이자 개혁대상 1호였습니다.

▶서의현 총무원장이 불교계의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 개혁대상 1호?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고 하지 마시고요.
당시 서의현 총무원장은 권력유착, 상무대 관련 비리 등으로 불교계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특히 1988년 5월에 개정된 종헌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장기집권(3선 연임)을 꿈꾸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뜻있는 인사들이 80년 민주화 운동의 동력을 살려 서 원장의 장기집권을 막고 불교계 민주화와 종단의 개혁을 이뤄냈습니다. 이것이 1994년에 있었던 종단개혁의 내용입니다.

▶종단개혁 운동과 관련하여 다 못한 말씀이 있다면...(손짓으로 청한다)
당시 조계종 종단개혁을 저희가 3월에 시작해서 4월에 완성했습니다. 그해 6월에 철도노조가 우리 종단개혁 운동을 롤 모델로 철도개혁을 시도했으며 소기의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철도개혁을 주도했던 민주인사들이 처음으로 조계사를 쉼터(피신처)로 삼아 조계사에 새로운 역사를 쓴 해이기도 합니다. 당시 민주인사들이 쉼터(피신처)로 이용할 수 있었던 곳은 유일하게 명동성당뿐이었습니다. 조계사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명동성당과 같은 성지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불교운동을 펼치면서 잃었던 건강회복을 위해 지선스님이 계시는 백양사로 내려가서 1년 정도 휴식을 취한다음 인사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씀이시네요

네. 인터뷰 서두에 말씀드렸던 입이 보살이라는 덕담을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인사동에 식당을 차려 함께 운영하자는 제안을 받아드린 것이 이곳 생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가 백양사에서 올라온 1998년도?
네.
'천강에 비친 달' 입구
'천강에 비친 달' 입구
▶이곳 이름이 ‘천강에 비친 달’입니다. 이름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 개의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친다는 ‘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정말 좋지 않습니까? 월인천강지곡, ‘천강에 비친 달’

▶네 좋습니다.(웃음) 그런데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상호는 어떻게 정하셨는지요?
처음 식당을 시작할 때 주위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모했습니다. 그중에서 채택된 상호가 ‘천강에 비친 달’입니다. 정말 좋지 않습니까? 뜻도 좋고, 듣는 느낌도 괜찮고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좋은 이름의 이곳, ‘천강에 비친 달’의 대표 메뉴를 소개하신다면?
(후후 웃음) 대표메뉴요. 술은 대한민국에서 딱 한곳 저희 ‘천강에 비친 달’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솔잎가루동동주”요. 안주는 요즘 흔치 않은 “노가리찜”입니다. 물론 다른 안주가 맛이 없다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가감 없이 전달하겠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계속해서 들어오는 손님들로 인해 우 대표는 중간중간 손님을 맞고 주방에 들어가 안주를 만들어 내놓곤 했다. 인터뷰를 더 빨리 끝내야 하는 이유는 빈자리가 없어 앉지 못하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인사들이 놓고 간 피켓
진보인사들이 놓고 간 피켓
▶이곳에 진보인사들이 많이 다녀가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인가요?
네. 맞습니다. 사실입니다.

▶우 대표께서 이곳을 진보인사들의 쉼터 혹은 시위를 마치고 오는 진보인사들에게 뒤풀이 공간으로 제공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뒤풀이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은 맞는 말이고요. 장소를 제공했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그분들은 이곳에 와서 돈을 내고 음식을 드셨으니까 제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우 대표께서 도움을 받으셨다는 말씀이시네요?
당연하죠. 그분들이 뒤풀이로만 도와주신 게 아닙니다. 초창기 때는 영업사원? 역할도 마다 않고 기꺼이 해주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이 그렇게 많이 도와주셨는지요?
말해도 되나(웃음)
386 대표주자인 이인영 선배와 한계레신문 기자분들이 잊지 않고 찾아주셨습니다.

▶'천강에 비친 달’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사실 이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 프랑스 혁명당시의 살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소원이고, 원력이지요.
(프랑스의 살롱 : 단순히 사교나 오락을 즐기는 것을 넘어 남녀노소, 신분과 직업의 벽을 넘는 대화와 토론의 장이었으며 문학공간으로 계몽사상의 산실이자 중계소로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 여성이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의 살롱처럼 이요?
네. 단순하게 술내주고 밥 내주고 음식 내줘서 돈벌이 수단의 공간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대화하고 논의하고 논쟁하며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여론형성의장 말입니다. 프랑스의 시민혁명 때 프랑스의 살롱처럼......

▶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우 대표에게 인사동은 어떤 곳일까요?
사람들은 인사동을 전통과 문화가 있고 옛것이 있어서 좋다고들 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 인사동은 삶입니다. 20대 때는 불교운동을 하면서 간간히 들리는 쉼터였고 4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의 저에게 인사동은 삶의 터전입니다.
한국의 고유종이 전통 '한지'
한국의 고유종이 전통 '한지'
▶우 대표가 바라보는 인사동은?
예전에 느낄 수 있었던 낭만과 전통은 자본과 돈의 논리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전통을 고수하는 상인들은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인사동을 떠나고,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화장품 가게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인사동의 전통과 옛것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 대표 개인이 그리는 인사동의 미래모습은?
인사동의 미래모습이요? 안타깝지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사동이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말씀하신다면?
희망이 있는 인사동, 옛것이 지켜지는 인사동, 가벼운 주머니를 찬 시인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인사동, 정이 오가는 인사동, 오래된 상점들이 즐비해 그것이 전통이 되는 인사동, 100년 된 술집과 찻집이 있어 명소가 되는 그런 인사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 대표님은 미혼이시지요?
네.

▶결혼을 안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결혼이요. 안한 게 아니라 못했습니다.(웃음)

▶법명이 있으시지요?
네. 약왕행입니다. (웃으며)무슨 뜻이냐고요?

▶네. 무슨 뜻입니까?
약사여래보살에 몸에 있는 병은 못 고쳐도 마음의 병은 고치고 가라는 뜻입니다.

▶인사동을 찾는 분들에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인사동의 주인은 인사동을 찾는 여러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사동의 수호천사 또한 인사동을 찾아주시는 여러분들입니다. 앞으로도 인사동을 많이 찾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래 계획은 15년을 더 사랑받는 것
미래 계획은 15년을 더 사랑받는 것
▶마지막으로 우 대표님의 미래 계획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서두에 인사동과 불교운동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씀드렸듯이 제 미래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인사동은 하나입니다. 제가 ‘천강의 비친 달’을 운영한지 올해로 15년 됐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아 15년을 더 운영해 제 1대 사장으로 이곳을 30년 동안 운영하는 것입니다.

‘천강에 비친 달’은 빈자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의 소모임을 위해 이곳을 예약하고 왔다는 중기닷컴(차량 종합관리 프로그램 개발 전문회사, 구로 소재) 이진태 팀장은 “오랜만에 이곳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밝히며 “그러나 손님이 너무 많아 음식을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은 불편했다”고 전했다.

지난 3월 15일(금) ‘천강에 비친 달’에서 이루어진 우성란 대표와의 첫 인터뷰 이후 전화와 서면 인터뷰가 추가로 진행되었으며 3월 27일 오후 최종 인터뷰가 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박강열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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