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좋은 돌봄을 생각한다
  • 입력날짜 2022-10-11 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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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를 만드는 수많은 정책, 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연결되어 있어!
  이윤진(진보당 영등포구위원장)
이윤진(진보당 영등포구위원장)
2020년 3월 2일 시작했어야 할 새 학기가 4월 16일 시작되었는데 등교가 아닌 온라인 개학이었다. 아이들이 두 달째 집에 갇혀 있으니 엄마들 사이에서 ‘돌밥돌밥’(돌아가면서 밥)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진 상황이었는데 이제 가정마다 컴퓨터 앞에서도 난리가 났다.

출근한 엄마는 집에 혼자 있는 아이가 로그인이 안 된다고 자꾸 전화하니 이렇게 해보라, 저렇게 해보라고 설명하다 아이와 함께 울고 말았다. 어젯밤 자기 전에 몇 번을 연습했지만, 컴퓨터를 처음 만져보는 열 살 아이에게 온라인 교실로 입장하는 과정은 귀빠진 날만큼 힘든 고비였다.

어르신들은 기가 막힌다며 “전쟁 때도 학교 문은 열었는데...”라고 말씀하셨다. 코로나19로 인한 큰 고비를 몇 번 넘기고 일상이 회복되어 가고 있으니 벌써 까마득한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교실에 확진자가 여럿 나왔다며 점심 급식도 못 먹고 갑자기 집으로 돌려보내 지기도 한다.

에피소드는 또 있다. 학생들이 등교를 안 하니 학교 급식실이 멈췄고 급식 예산이 지출되지 않으면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던 농가가 위기에 빠졌다. 서울시는 초중고 학생이 있는 집으로 농산물 꾸러미를 보냈다. 다양한 식재료가 큰 박스로 배달됐다.

몇 달째 과다한 식비 지출로 근심이 컸던 학부모들은 꾸러미 사진을 찍어 올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누구네 꾸러미 구성이 좋은지 비교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학교 급식실에 식재료를 납품하던 농가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가정에서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배추, 호박, 버섯, 마늘, 파 등 각종 식재료가 상할까 봐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우리는 질문하기 시작했다. 학교와 회사 문이 닫혀 집에서 온라인 수업과 재택 근무하게 된 사람들을 누가 돌보고 있는가? 복지관과 센터가 문을 닫으면 집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 장애인과 노인을 누가 어떻게 돌보게 되는지 생각하며 방역지침을 내고 있는가? 서울시는 식재료 꾸러미를 계획할 때 가사노동의 몫을 떠올리긴 했을까?

팬데믹으로 세상이 멈춘 것처럼 보여도 아이, 장애인, 노인, 환자를 돌보는 일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었다. 학교, 직장, 병원이 문을 닫으면 그곳에 가지 못한 사람을 누군가는 돌봐야 했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가 그 몫을 담당해야 했고 굉장히 자연스럽게 대부분 가정에서 여성이 그 일을 맡았다. 엄마들은 긴급돌봄 휴가와 연차를 다 끌어 쓰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세상과 교류하지 않으면 퇴화하는 발달장애인과 단둘이 지내야 하는 상황을 버티다 스스로 생을 끝낸 안타까운 사연이 넘쳤다.

코로나 팬데믹 1년을 돌아보는 여론조사와 통계로 스트레스나 우울증 지수가 가장 높아진 계층이 주부라는 결과가 연이어 나오자 여기저기 언론에서 분석 기사가 쏟아졌다. 그 결과 지난 대선에서 ‘돌봄’이라는 단어가 부각하기 시작했고, 여러 지자체에서 ‘돌봄노동’을 필수노동에 넣어 관련된 조례를 제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한층 성장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누군가 빨아준 옷을 입고 누군가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 취업까지 한 청년도 정서적 돌봄이 필요하더라. 세상에 돌봄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는가? 돌보는 일이 멈추면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데, 왜 돌봄노동은 경제적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가? 한순간도 멈출 수 없고 항상 필요한 노동인데 왜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코로나19 이전에도 ‘돌보는 일’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었다. 무상급식, 아동수당, 의료비 지원, 각종 바우처 등 복지국가를 만드는 수많은 정책이 따지고 보면 돌봄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분배할지가 초점이었던 지난 논쟁과 정책은 한계가 드러났다. 수많은 복지프로그램은 팬데믹이 오니 힘을 쓰지 못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개별가정의 몫이 커졌고 성차별과 양극화가 심화됐다. 아이들에게는 돌봄 격차가 학력 격차로 이어졌다. 저 출생과 고령화 문제는 길이 있나 싶은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온 우리는 ‘돌봄’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돌보는 일’을 여러 정책의 귀퉁이 한 분야 예산과 서비스를 조금 늘리는 차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종합적인 시선에서 보고 국가의 책임성을 결정적으로 높여야 한다. ‘돌봄’을 헌법 제10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으로 표현된 ‘기본권’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고 세상을 유지하는 원천이다.

누구나 좋은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고,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도 좋은 돌봄을 행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 누구도 돌봄 공백 때문에 고통받지 않게 해야 하고,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돌봄노동의 가치와 사회적 책임을 올려세운 새로운 사회가 코로나 팬데믹 희생자와 숨은 영웅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이윤진(진보당 영등포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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