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년 만에 찾은 광천, '독배' 안에는 새우젓이...
  • 입력날짜 2012-12-15 04:01:12 | 수정날짜 2012-12-15 04: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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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걸려온 전화인데 그렇게 길어?"
"2층 병동의 김 여사예요. 쉰이 넘도록 요양사로 근무해 오다가 얼마 전 간호조무사(AN) 자격증을 따낸 억척 아줌마죠. 어제 영복이(아내 친구)가 보낸 생일 축하메시지를 보고, 저녁을 사겠다고 하더니... 오늘도 근무가 어떻게 되느냐고 전화했어요."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 방에서도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일요일(9일), 노인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와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아내가 친구에게 생일 축하메시지가 담긴 문자를 받았다는 대목에서는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할 말을 잃었다. '띵'해진 머리를 한참 굴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라, 토요일(8일)이 자기 생일이었나? 나는 깜빡 잊고 있었네."
"나도 생일인 줄 모르고 일 하다가 문자를 보고서야 알았죠. 김 여사가 그동안 조언을 해주어서 고마웠다면서 퇴근하고 저녁을 산다고 하기에 미끄러운 빙판길 핑계 대고 곧장 집으로 왔죠. 그러고 보니 오늘은 돌아가신 군산 어머니 생신이네요."

아내가 16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일을 챙기니까 미안한 마음이 더했다. 아내 생일은 음력 시월 스무닷새로 시어머니 생일보다 하루가 빨랐다. 아내는 신혼 때부터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생일이면 형님 댁으로 음식을 장만하러 다녔다. 그러한 사연으로 오징어 한 두 마리라도 생일선물을 꼭 챙겼는데, 올해는 날짜마저 잊어버렸던 것.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위기, 기차여행 기회로 삼아

도로변에 만개한 눈꽃, 생화처럼 곱고 화려하다.     © 조종안
도로변에 만개한 눈꽃, 생화처럼 곱고 화려하다. © 조종안
 

설거지를 마치고 서재로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올해가 결혼 30주년이 되는 해다. 그 기념으로 함께 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여행은 여행이고, 생일은 생일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내 생일 날은 축하라도 하듯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그것도 모르고, 오후에 전화해서 '저녁에 동창하고 술 한잔하기로 해서 늦을 것'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어떻게 하면 아내의 서운함을 풀어줄지 고민하다가 지난 10월 하순 형님 내외와 잠깐 들렀던 충남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독배) 사돈댁 젓갈가게가 떠올라서 거실로 나갔다.

"어이, 얼른 옷 갈아입으라고. 오랜만에 하얀 눈길을 걸으면서 데이트 한 번 하게. 자기에게 보여줄 것도 있고."
"조금 전 TV 뉴스에서도 오늘이 가장 춥다고 하는데 어디를 나가요. 그냥 집에 있어요. 도로가 꽁꽁 얼어서 운전도 못 한단 말이에요."

아내는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끈따끈한 장판을 고수하며 고집을 피울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아내는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날 어디를 가려 하느냐고 캐물었다. 그러나 가보면 알게 된다면서 대답을 미루었다.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11시 50분,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군산역으로 향했다.

집에서 군산역까지 소요 시간은 15분가량.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대합실에 들어서니 훈훈한 난방열이 부드러운 목화솜 이불처럼 온몸을 감쌌다. 마침 12시 42분 발 용산행 새마을호 열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광천(廣川)까지 승차권 두 장을 구입했다. 요금은 12600원.

용산행 열차는 정시에 들어왔고,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과 함께 육중한 몸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과 눈꽃이 별천지를 연출하는 금강 주변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군산역 플랫폼을 빠져나온 열차는 워밍업 하듯 금강하굿둑 철교를 지나 하얗게 변한 겨울풍경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눈으로 뒤덮인 산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조종안
눈으로 뒤덮인 산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조종안
 

기차여행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낭만적이다. 하물며 산천초목이 온통 새하얀 겨울에는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위기를 기차여행으로 반전시켰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내도 기차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야~ 들녘의 설경이 참 아름답다!"라며 탄성을 터뜨렸다.

1970년대만 해도 군산에서 광천에 가려면 해망동 도선장(나루터)에서 객선을 타고 장항으로 건너가 완행열차로 2시간 30분이상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연착을 밥 먹듯 하던 시절이어서 3시간도 넘게 걸리는 때가 허다했다. 기차와 배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4~5시간 걸리던 거리를 한 시간이면 도착한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37년 만에 찾은 형수 친정동네 독배의 추억
광천역 건물. 고향 역만큼이나 정감이 갔다.     © 조종안
광천역 건물. 고향 역만큼이나 정감이 갔다. © 조종안
 

열차는 오후 1시 43분 광천역에 도착했다. 서울을 오갈 때는 주로 장항선을 이용해왔다. 하지만 광천에서 하차는 1975년 이후 처음이어서 만감이 교차했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찬바람이 볼때기를 세차게 후리고 멀리 달아났다. 대단한 추위였으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서 그런지 목까지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아내의 제의로 광천역 부근의 재래시장을 돌아보았다. 김장철이 지나서 그런지 젓갈시장은 한산했으나 재래시장은 방한복 차림 상인의 친근한 호객 소리로 생기가 돌았다. 막대기처럼 얼어붙은 명태들이 맹추위를 실감나게 했다. 칼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하는 노상에서 끝이 뾰쪽한 '쪼시게'로 석화를 까는 할머니에게 굴을 사려다가 올 때 다시 들르기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독배 입구, 왼쪽은 구도로, 오른쪽은 새로 난 도로이다.     © 조종안
독배 입구, 왼쪽은 구도로, 오른쪽은 새로 난 도로이다. © 조종안
 

시장에서 건널목을 지나 '독배'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1963년 초가을, 광천 어머니댁에 전해줄 고추 20근을 짊어지고 흙먼지 날리는 자갈 길을 낑낑대며 심부름 가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이 시나브로 떠올랐다. 마을 뒷산에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유래된 '독배'는 옹암리의 별칭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고깃배와 상선이 드나드는 포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푸념처럼 늘어놓는 얘기를 묵묵히 듣기만 하던 아내는 독배에 도착하자, 광천 어머니댁은 어디에 있고, 토굴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등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통 한옥을 개조한 사돈댁 가게(옹진상회) 간판을 보니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사돈댁 고향은 황해도 해주 옹진으로 돌아가신 아버지(1900~1966)와 동향이었다.
친자매처럼 지냈던 군산 어머니(오른쪽)와 광천 어머니(왼쪽). 1970년 봄 창경원(창경궁)     © 조종안
친자매처럼 지냈던 군산 어머니(오른쪽)와 광천 어머니(왼쪽). 1970년 봄 창경원(창경궁) © 조종안
 


1930년대 초 상고선(장삿배) 선장이던 아버지가 독배 포구에서 자식도 없이 관(館: 요정 비슷한 식당)을 운영하던 광천 어머니(1914~1975)를 만나 왕래를 하면서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처럼 지낸 이야기, 훗날 광천 어머니 중매로 형님이 독배에 살던 얌전한 규수(형수)와 부부의 연을 맺는 과정 등을 아내에게 설명해 주었다.

광천 어머니 회갑잔치 때는 군산의 어머니는 물론 유명한 기생들과 축하객들이 다녀갔으며, 돌아가셨을 때(1975)는 7남매 모두 참석해서 장례를 지낸 얘기도 해주었다. 친구처럼 지내던 한 살 아래 조카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이곳으로 놀러 왔다가 저수지에서 익사한 가슴 아픈 사연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느냐!"며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옹진상회에 들어서니 사돈 자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50대 후반의 사돈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무척 상냥했다. 그는 아내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지난 번에는 바빠서 그냥 가셨으니까, 오늘은 꼭 새우젓하고 진지를 조금이라도 드시고 가세요!"라며 안으로 들어가 밥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드시라며 쑥개떡을 내왔다.
사돈댁 토굴. 독배에는 토굴이 20여개 남아있다고 한다.     © 조종안
사돈댁 토굴. 독배에는 토굴이 20여개 남아있다고 한다. © 조종안
 


"날이 몹시 추운데 멀리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네요."
"오래 전부터 다녀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오늘 기회가 되어 나섰습니다. 노인병원에 근무하는 아내가 쉬는 날이거든요.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가 새우젓을 숙성하는 토굴도 보여주고, 이런저런 추억이 담긴 독배도 구경하려고 함께 나왔습니다. 아내는 독배가 처음이거든요."

아내 생일을 깜박 잊는 바람에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못 하고, 토굴을 구경시켜달라고 돌려서 말했다. 맛깔스런 육젓에 밥을 한 공기 맛있게 먹었다. 사돈의 안내로 미로처럼 복잡하게 뚫린 토굴을 돌아본 아내는 "꼭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 같다"며 연신 감탄했다. 예정에 없던 아내와의 나들이는 독배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광천 어머니가 살았던 색바랜 고옥(古屋)을 돌아봤다.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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