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쑥개떡 잔치 사진도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다!"
  • 입력날짜 2013-01-12 04: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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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를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막내 누님을 그리며
▲ 막내 누님 영정사진.     © 조종안
▲ 막내 누님 영정사진. © 조종안
 
남편과 자녀의 보살핌 속에 각종 암과 투병하던 막내 누님이 작년(2012) 12월 22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경기도 평택에 살면서 2007년 봄 유방암 수술 후 경과가 좋아 자원봉사를 다니기도 했던 누님. 2009년 자궁암, 폐암 수술을 연거푸 받고도 생명에 대한 집념과 의지가 강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2009년 2월 17일 누님이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아침마다 누님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하면서 효과가 있을 거라고 위로를 했는데 이제는 기도도 필요 없게 되었다.

6개월 전, 항암치료를 중단했다는 얘기를 듣고 '시한부 삶'을 예상했으나 22일 새벽에 걸려온 전화는 몸이 뭔가에 짓눌리는 아픔을 줬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갑작스러운 바이러스 침입으로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예상치 못했던 제18대 대통령 선거 결과 등으로 '멘탈 붕괴' 상태여서 충격이 더했는지도 모른다.

누님은 투병 중에도 "세상에는 부자로 살면서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해도 상대가 더 듣고 싶도록 재미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도 저도 아니고, 남 약올리기 좋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낙천적이었다.

일주일을 넘기기 어려운 환자도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숨을 거두기 일주일 전 동생이 운전하는 차로 형님과 함께 방문했을 때도 병색이 짙어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겠구나!" 소리가 절로 나오면서 위로도 못했다. 그러나 누님은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도 밝은 표정을 보여주어 마음을 더욱 아리게 했다.

24일 오전 자녀들의 오열과 가족 친지들의 애도 속에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해서 큰아들 부부가 거주하는 충북 청주의 목련공원 납골당에 유골을 모셨다. 예순일곱 살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막내 누님은 평소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스님과 신도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영정 앞에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1958년 추석. 중학생 형님과 셋째누님(가운데),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막내 누님(왼쪽).     © 조종안
1958년 추석. 중학생 형님과 셋째누님(가운데),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막내 누님(왼쪽). © 조종안
 
소꿉동무처럼 지냈던 막내 누님
막내 누님의 어렸을 때 다른 이름은 '까막녜(女)'. 피부가 까마귀처럼 새카맣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군산에서 손꼽는 부잣집에서 예쁘게 보고 친딸처럼 키우겠다고 데려갔는데, 고급 양과자를 손에 쥐여주며 어르고 달래도 싫다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누님은 나보다 네 살 위로 어렸을 때 교회 주일학교를 함께 다녔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부엌 아궁이에 밤도 구워먹고, 성에꽃이 만개한 유리창에서 숨은그림찾기를 하였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이면 마당이 넓은 집을 찾아다니며 모종을 하거나 씨를 뿌리고 새싹이 움트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봤다.

여름방학을 하면 자투리 옷감을 골라 와이셔츠 상자에 좌우로 배치해서 숙제(옷감의 종류)도 해주고, 봉숭아 잎을 따서 백반을 넣고 찧어 손톱에 물들이느라 법석을 떨었다. 봉숭아 잎을 헝겊에 싸서 손가락 끝에 단단히 묶고 잠들었다가 빠져나가 투정부리던 일들이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다.

가을에는 꽈리나무 가지에 꽃받침이 커지면서 열매를 감싼 짙은 주황색의 꽈리가 꽃보다 예쁘게 매달리는데, 꽈리를 입에 넣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 듯하면서 '꽈르륵 꽈르륵' 소리를 내는 누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리 연습해도 입술만 아팠기 때문이었다.
▲ 스무 살 되던 해 어느 날 목욕탕에 다녀오다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 조종안
▲ 스무 살 되던 해 어느 날 목욕탕에 다녀오다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 조종안
푸념처럼 했던 말들,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을 아프게 해
열네 살(1959) 되던 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막내 누님은 그해 가을에 결혼한 셋째 누님에게 바통을 넘겨받아 밥을 해먹었다. 당시엔 가족만 일곱 식구였고, 끼니 때마다 식객이 끊이지 않아서 부엌살림이 무척 고단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들로부터 얌전하고 손끝이 야무지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누님에게는 그 칭찬이 비수처럼 아프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학생들 등하교와 겹치는 오전 오후 시간에 밖으로 나가기를 꺼렸던 막내 누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단발머리에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팥죽장사 아주머니 딸, 시장 종이집 아저씨 딸, 동네 이발소 딸들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집으로 찾아와도 잘 만나주지 않았던 것을 보면 당시 막내 누님의 심정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부지런하고 활동적이었던 막내 누님은 철없는 내가 듣기에도 짠하게 느껴지는 얘기를 친구에게 푸념하듯 종종 했다. "수녀(修女)가 되어 수도생활을 하고 싶다", "비구니가 되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단발머리 차림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학생처럼 보이지? 내가 중학교만 졸업했어도 여군(女軍)에 지원했을 것"이라는 말은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가슴을 때린다.

지금도 안부를 묻는 동창이 있을 정도로 집에 오는 친구들에게도 잘 해주었던 막내 누님은 1969년 이웃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매형)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1년 남짓 함께 살기도 했는데 누님은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모두 떠안은 듯 삶이 순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으로 돈을 모아 교직에서 은퇴한 매형과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낼 시기에 암이라는 무서운 병마와 싸우다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 2008년 6월 부산 동백섬에서 큰누님(오른쪽)과 막내 누님(왼쪽).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 조종안
▲ 2008년 6월 부산 동백섬에서 큰누님(오른쪽)과 막내 누님(왼쪽).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다. © 조종안
 
▲ 막내 누님이 몸에 좋다며 찐 달걀을 권하고 있다.     © 조종안
▲ 막내 누님이 몸에 좋다며 찐 달걀을 권하고 있다. © 조종안
 
나의 고통, 인간 승리의 주역이 된 지인에게 비하면 조족지혈
부산에 살던 2008년 내 생일에 손수 만들어온 '쑥개떡'과 '송편', '찐계란' 등을 해송과 동백이 우거진 동백섬 산책로 한쪽에 펼쳐놓고 먹으면서 생일을 축하해주던 막내 누님 모습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내가 사진을 찍자 "우리가 동백섬에서 '쑥개떡 잔치'를 벌이는 것도 훗날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다"라며 활짝 웃던 누님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누님 넷 중 친구처럼 때로는 선후배처럼 지낸 시간이 가장 길었고, 그 시간에 비례해서 정도 깊이 들었으며 사연도 많았던 막내 누님. 그러한 누님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저승으로 떠나고 황량해진 공간을 채우기 위해 외식도 해보고, 기차여행도 했으며 아내와 동반으로 남해안 여행도 다녀왔는데 그때뿐이었다.

장례를 치른 지 보름이 넘었음에도 누님의 정겨운 얼굴이 언뜻언뜻 내비치면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이별을 하게 마련이고, 한 번은 죽음을 맞이하는 이치를 알면서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러다가 메너리즘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미로게임 하듯 번뇌를 거듭하다 엊그제야 기회를 잡았다. 40년 공직 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한 뒤 자선단체 회장 임기 3년을 마치고 물러나는 지인의 퇴임식장 방문이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가 됐던 것. 조실부모하고 큰어머니 밑에서 자랐음에도 인간승리의 주역이 된 그에게 비하면 나의 고통은 조족지혈, 아니면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종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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