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산 야구가 걸어온 길
  • 입력날짜 2013-03-12 04: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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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서양의 근대 운동경기(축구, 야구, 농구 등)가 소개된 것은 1895년(고종 32년) 2월 신교육령(新敎育令)이 공포되고 근대교육기관이 개설된 이후로 알려진다.

서양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 교사들과 개화된 일부 지도층에 의해 화류회(운동회)가 열리고, 구기종목이 전수된다. 그 중 타구(打球), 격구(擊毬)로 불리었던 야구는 1905년 황성기독교 청년회 초대 총무 질레트(Gillette)가 회원들에게 경기방식을 가르치면서 시작됐으며, 초기 선수들은 솜바지에 망건을 쓰고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1910년대 산발적으로 열린 운동경기는 민족적 자주독립 의식이 고조되면서 피압박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터뜨리는 한풀이 한마당의 성격이 강해졌고, 1919년 1월 고종 승하와 3·1 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일제에 대한 항쟁의 수단으로, 조직적인 체육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일제의 감시, 통제 또한 날로 더해갔다.

군산 야구가 걸어온 길
▲ 미국 선교사들이 1903년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에 설립한 영명학교     ©조종안
▲ 미국 선교사들이 1903년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에 설립한 영명학교 ©조종안
 
군산의 야구는 1921년 구암리 기독교청년회와 군산은행의 경기, 1922년 군산 영명학교와 광주 숭일학교의 경기 기록, 학교 설립 시기 등으로 미루어 1910년대부터 야구팀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군산 공립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에 다니다가 1920년 심상 고등소학교(군산초등학교)로 옮겨, 야구를 시작했다는 김판술(1909-2009) 전 의원 회고가 이를 뒷받침 한다.

군산 체육협회가 주최하고 오사카(大阪) 조일신문사 군산지국이 후원하는 호남 야구대회가 1928년 6월 16~17일 양일간 군산중학교(군산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대전, 이리(익산), 전주, 광주, 군산팀이 참가하여 이틀 동안 열띤 예선전을 펼친 후 대전과 군산팀이 결승에 올라 군산팀이 6대 3으로 쾌승, 택촌(澤村) 군산 부윤으로부터 우승기를 받았다.

1923년 5월 일본인에 의해 개교한 군산중학교는 일찍이 야구부가 창단된다. 군산중은 1928년 7월 28일 경성구장에서 개최된 오사카 매일신문사 주최 제15회 전일본 중등학교 야구우승권대회 조선대회에 출전한다. 그러나 서울 휘문중과의 1차전에서 5회 기권패(콜드게임)를 당한다. 휘문중은 1907년에 야구부를 창단한 야구의 명문.

당시 휘문중 팀은 순수 한국인 학생으로 구성돼있는 반면 군산중은 남촌(南村), 등전(藤田), 중서(中西), 길미(吉尾), 유상(有常), 십본(辻本), 김판술(金判述), 등전무(藤田茂), 분자원(盆子原) 등으로, 김판술을 제외한 선수 모두가 일본 이름이어서 눈길을 끈다. 군산중은 17회 대회와 19회 대회에도 계속 참가하는데, 한국인 재학생은 전체의 5% 미만이었다 한다.

군산중을 졸업한 김판술은 일본에 유학하여 우쯔노미야(宇都宮) 고등 농림농과에 다닐 때까지 4번 타자로 활약하다 교토(京都)대 농림화학과로 진학해서 선수생활을 그만둔다. 그러나 의원 시절(1957)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행정부-입법부 친목야구시합 때 선수로 뛸 정도로 야구에 애착이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야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군산 공설운동장(1930년대), 스텐드(관람석)도 갖춘 운동장이었으나 1970년대 후반 주택단지가 되었다.     ©조종안
▲ 야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군산 공설운동장(1930년대), 스텐드(관람석)도 갖춘 운동장이었으나 1970년대 후반 주택단지가 되었다. ©조종안
 
군산의 조선인 체육은 1932년 군산부 일출정(금암동)에 부영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지고, 각 단체가 창단 또는 재조직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1930년대 이전에도 몇 개의 체육단체가 활동했으나 한 때 바람으로 끝났고, 그동안에 없던 농구클럽 출범과 축구클럽의 개혁, 야구클럽(척우단 후신) 재조직 등으로 전기를 마련한다.

군산 야구는 진즉 척우단(拓友團)이 결성되어 1929년 전의용씨 인솔로 전 조선 야구대회에도 출전한다. 그 후 선수들의 이사, 사망 등으로 침체기를 거쳐 1933년 7월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재조직, 전주팀과의 경기에서 24대 0으로 대승한다. 당시 야구클럽 연락처는 군산부 동영정 동화의원에 두었고, 간부는 이창근, 전의용, 김수복 등이었으며. 경비는 회원 20여 명의 회비로 운영하였다.

1935년 7월 군산부 공설운동장에서 동경유학생 야구팀과 군산팀의 야구 대회가 열렸다.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 지국과 조선 매일신문 호남지사가 공동주최하고 입장료 20전을 받았음에도 수천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날 경기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호각접전을 벌이다가 군산팀이 8대 7로 승리. 유학생 팀은 비록 패했으나 열정과 투혼으로 많은 격려를 받았다.

전쟁에 광분한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기독교학교 폐쇄와 조선인 체육대회 중단 등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던 1938년부터 해방(1945)되는 해까지 군산 야구팀이 전국 규모대회에 참가한 기록이 없으며 1946년 10월 개최된 제27회 전국체육대회에 군산상업학교, 28회 대회와 30회 대회에 군산중학교 야구팀이 참가하였다.

군산 야구와 황금사자기 대회와의 인연

좌우대립으로 혼돈이 극에 달했던 1947년 여름 황금빛 사자가 첫 포효를 터뜨린다.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제1회 황금사자기 대회가 개막한 것. 공식명칭은 '제1차 전국 지구대표 중등야구 쟁패전'으로 전국을 서울, 경기, 강원, 충남(충북포함), 전남(제주포함), 전북, 경북, 경남 등 8개 지역으로 나눠 지역 예선, 혹은 추천을 받아 참가하는 방식이었다.
▲ 1960년대 초 군산중학교 야구경기 모습     ©조종안
▲ 1960년대 초 군산중학교 야구경기 모습 ©조종안
 
군산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당시 남전(한국전력) 군산지점 야구팀 후원과 정윤기, 황동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재창설한 군산중학교 야구팀이 전북지역 예선에서 전주공업을 14대 1, 군산상업을 11대 1로 제압하고 본선에 진출하면서 황금사자기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개막전은 8월 20일 강원중-경남중이 가질 예정이었으나 강원중의 뜻밖의 화재로 불참. 경남중의 기권승이 확정된 데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하루 연기된다. 21일 오후 1시 동아일보사 최두선 사장의 개회사와 김동성 조선 야구협회 회장의 축사에 이어 군산중 구한섭 주장의 선수대표 선서로 개회식을 마치고 2시 35분 군산중-동산중 대결로 플레이볼 되었다.

개막 날 서울운동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을 이뤘으며 조선 유일의 베이스볼 아나운서 윤길구 씨가 중계방송을 한다고 해서 더욱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황금사자기 개막전 첫 투구는 인천 동산중 박현식에 의해 뿌려졌고, 첫 타자는 군산중 최문길 선수였다.

당시 군산중 진용은 정윤기 감독, 황동, 최문포 코치 지도로 투수 최명보, 포수 서병철, 일루수 조상기, 이루수 이순철, 삼루수 최문길, 유격수 최동현, 우익수 이문갑, 좌익수 구한섭(주장), 중견수 김우효, 후보 선수 5명(김진복, 육기술, 노재욱, 김양수, 최성현)으로 짜여 있었다.

군산중의 선공으로 시작한 이날 경기는 2시간 10분에 걸쳐 치러졌다. 동산중이 1회에 두 점을 선취하자 군산중이 2회와 4회에 각 한 점씩 뽑아 동점을 만드는 등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동점 번복만 3차례. 9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다가 연장 10회 말 군산중이 1점을 내주면서 5대 4로 석패한다.

군산중은 그해 5월 서울 원정경기에서도 휘문, 경동, 인천공업, 인천상업 팀과 대결, 연전연승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6월에는 공주중학, 이리(익산) 농업팀과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둬 야구 평론가들에게 강팀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1차전에서 탈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는 1948년 2회 대회는 호남지방을 휩쓴 30년만의 대홍수로 전·남북 및 충·남북 지역 4개 팀이 불참하고, 전년도 우승팀 경남중을 비롯해 경기중, 부산중, 대구 능인중, 인천공업, 강원농업 등 6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경남중은 경기중과의 결승 경기에서 4대 1로 승리 대회 2연패를 차지한다.
▲ 일제강점기에 개교한 군산중학교와 부속건물     ©조종안
▲ 일제강점기에 개교한 군산중학교와 부속건물 ©조종안
 
군산중은 절치부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제3회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했으나 1회전에서 탈락한다. 당시 진용은 감독·부장 정윤기, 코치 김태준, 주무 이완동, 선수 정흥태(투수), 김창인(포수), 조춘환(일루수), 이태환(이루수), 김상훈(삼루수), 최문길(유격수), 김재환(좌익수), 박인안(중견수), 김재권(우익수), 후보 선수 장명석, 임양수 등이었다.

황금사자기 쟁패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4년 동안 열리지 못하다가 1954년에 부활한다. 전쟁과 학제 개편(중·고 분리)의 혼란 속에 대부분 야구부가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군산중도 군중, 군고(각 3년)로 분리되면서 야구부가 중학교에 존속되고, 전·남북고교팀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 호남은 고교야구 불모지로 전락한다.

그러나 훗날 군산 야구의 '대부'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경성고무(주) 사장 이용일씨. 그가 10여 년의 각고 끝에 1968년 창단한 군산상고는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극적인 우승으로 호남 야구의 긴 침묵을 깨고, 군산 야구와의 인연도 다시 잇는다. 그 후 제40회, 제53회 대회에서 우승, 인연의 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자료출처: 전북체육 1백년사(상권), <동아일보> 기사, 군산 시청(사진)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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