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 도산 안창호 선생!
  • 입력날짜 2013-03-11 0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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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은 평생을 조국 해방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서거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75주기가 되는 날이다.이를 추모하기 위해 3월 9일 오전 11시, 도산기념사업회와 흥사단이 공동 주최한 75주기 추모식이 강남 도산공원에서 거행됐다.
 
이번 75주기 추모식에는 최근 북한의 핵위협과 국가 안보상의 위기속에서 새 정부의 부재, 정치권의 갈등속에서 국민단결을 주창했던 위대한 지도자의 정신과 가르침을 되새기려는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헌화가 줄을 이었다.

백낙환 도산기념사업회 회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 회장, 반재철모 흥사단 이사장의 추모사와 추념사가 이어지고 서울숭의여자고등학교 학생대표의 도산 선생에게 바치는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그리움에 차게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도산 선생은 서재필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쳤다.

1905년 미국에서 조직한 공립협회는 2년도 채 안돼는 단기간에 600여 명의 회원을 모을 정도로 힘있는 단체로 성장한다.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도산 선생은 1907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 지휘하였다.

이 무렵 일본 총독 이토가 약관의 나이 29세의 도산 선생을 만나 소위 도산 내각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이를 일축한 후로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된다.

1909년 도산 선생은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 청년학우회를 창설하는 등 전국민을 상대로 조직화 운동에 착수하던 중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2달 만에 석방된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적인 국치를 눈앞에 두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도산 선생은 북경,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면서 해외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합동으로 청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그 결과는 암담했다. 하여 도산 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이끌었고,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을 만든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선생은 불행하게도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결국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도산 선생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도산 선생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았다. 도산 선생의 60 평생 가운데 그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두었으며, 후반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바쳤다.
 
선생은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한 선생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 서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도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도산 선생의 가르침은 여전히 현 시대에 절절한 교훈으로 다가온다. 특히 정치권의 난맥상과 남북 갈등의 형국속에서 선생의 국민화합의 가르침이 새삼 가슴을 파고든다.

진정한 나라 사랑의 그 한길을 가는 우리의 정치인, 지도자는 우리 현 시대에 진정 없는 것인가. 지금 각계의 지도자들이 도산 선생과 같은 선열들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반이라도 따라가려고 노력한다면 작금의 나라모습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화창한 봄날,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무치는 날이었다.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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