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나메기 세상’ 꿈꾼 백기완 선생, 시민 배웅 속 영면
  • 입력날짜 2021-02-19 2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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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선생님의 자리 지키겠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모두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던 ‘노나메기’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 소장의 발인식과 영결식이 2월 19일 오전 사회장으로 열렸다.

백기완 선생은 임종 직전에 ‘중대 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김진숙 힘내라’, ‘노나메기!!!’를 글로 남겼다.

15일 타계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아래 장례위)' 주관으로 19일 오전 8시에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발인식에는 한국 민중·민족·민주화운동의 큰 어른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려는 조문객 4백여 명이 운집했다.

조문객들은 원작자인 백기완 선생의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의 ‘남김없이’가 쓰인 리본과 백기완 선생이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머리띠를 달고, ‘노나메기’ 글자가 적힌 마스크를 나눠 썼다.

장례위는 발인을 마치고 서울 종로에 있는 통일문제연구소를 거쳐 백기완 선생이 생전에 매일 찾던 학림다방에서 고인을 추모했다.

학림다방을 나온 운구 행렬은 대학로에서 출발해 이화사거리, 종로 5가, 종각역 사거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종각역 사거리에서는 거리굿이 열렸다. 장례위는 백기완 선생이 민족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만큼 꽃상여와 대나무 깃대가 달린 만장, 각종 상징물 등을 사용해 전통 장례 절차를 재현하는 노제를 했다.
학림다방을 나온 운구 행렬은 대학로에서 출발해 이화사거리, 종로 5가, 종각역 사거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종각역 사거리에서는 거리굿이 열렸다. 장례위는 백기완 선생이 민족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만큼 꽃상여와 대나무 깃대가 달린 만장, 각종 상징물 등을 사용해 전통 장례 절차를 재현하는 노제를 했다.

오전 11시 30분경 상여가 서울광장에 도착하자, 장례위는 촛불을 켜고 영결식을 진행했다. 영결식에는 세월호 유가족들, 이재명 경기도지사, 심상정 국회의원 등 1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영결식은 김소연 노동운동가의 진행으로 문정현 신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김미숙 김용균 재단 이사장, 명진 스님 등이 추모사를 하고, 정태춘 씨가 추모곡을 불렀다.

노구의 문 신부는 “선생님을 다시 뵙는 그 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며 “고맙습니다”를 목 놓아 반복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저도 힘내서 선생님께서 평생 낮은 곳을 향해 힘을 주셨던 것처럼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발맞추며 따르겠다”며 “저세상에서 용균이 만나면 꼭 한 번 안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다.

이날 영결식에서 가수 정태춘 씨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부르며 백기완 선생을 추모했다. 마지막으로 영결식에 함께한 시민들은 백기완 소장이 생전에 “유일하게 떠오르는 곡”이라며 언급했던 김호철 작곡의 노동가요 ‘민중의 노래’를 함께 합창했다.

운구 행렬은 영결식을 마친 뒤 오후 2시 정도 장지인 경기도 남양주로 이동해 하관식과 평토제를 진행했다. 선생은 마석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무덤 옆에 안장됐다. 장례위에는 노동·통일·종교·시민사회·학술 등 인사와 시민 6천104명과 562개 단체가 참여했다.
故 백기완 선생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했다, 여덟 식구가 남북으로 갈라져 살게 되자 집안을 하나로 잇고자 1945년대부터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52년부터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열어 도시빈민운동, 농민운동가로 젊은 날을 보냈으며,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1967년에는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 설립을 시도했다. 1971년 장준하 선생과 ‘민족학교’를 열었으며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독재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1974년에는 재야인사들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고 75년에는 장준하 선생 암살 진상규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보안사로 끌려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당했다.

87년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6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민중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이후에는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동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힘써오며 언제나 민중 투쟁 현장의 맨 앞자리를 지켰다.

김수현 공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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